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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많은 분들이 책을 읽은 후, 머릿속에 남는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분명 인상 깊게 읽었고 감탄했던 문장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맙니다. 그저 책장을 덮는 것만으로 그 책이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록하는 독서'의 중요성이 떠오릅니다. 독서는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머물게 하고 삶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의 핵심은 ‘기록’에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왜 기록이 독서를 완성시키는가, 어떻게 기록을 통해 읽은 것을 삶 속에 남길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억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습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남지 않습니다
독서는 생각의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문은 읽는 순간에는 열려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닫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정보량이 많은 시대에는 책을 읽고도 다음 날이면 내용이 희미해지는 일이 흔합니다. 감동이나 통찰을 느꼈어도, 그것이 자신의 언어로 정리되지 않으면 결국 머릿속에서 증발해 버립니다.
기억은 본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 뇌는 새로운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는 동시에 낡은 정보를 지워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책 속의 내용도, 스스로의 생각도 쉽게 소멸됩니다. 이럴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기록입니다. 기록은 기억의 외부 저장소입니다.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글자로 남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록은 단순한 메모를 넘어서 ‘생각의 재구성’입니다
기록하는 독서는 단순히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것과는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왜 그 문장을 기억하고 싶은지를 함께 써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 문장을 읽고 내가 떠올린 장면은 무엇이었는가?”, “이 생각은 내 삶과 어떤 연결점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붙여보는 것입니다.
기록은 단지 정보를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독자가 능동적으로 텍스트와 교감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입니다. 기록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책의 내용을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냥 읽고 넘겼다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연결과 사유의 가지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록하는 독서가 단순한 ‘읽기’와 다른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면 좋을까요?
독서 노트를 쓰는 다양한 방법들
기록 방식은 정해진 틀이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대표적인 형식을 소개드리면, 독서 노트를 세 가지 층위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발췌: 마음에 드는 문장, 중요한 개념, 통찰을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이때 문장을 그대로 적되, 출처(페이지 수)도 함께 적으면 이후에 다시 찾아보기에 유용합니다.
감상: 그 문장을 읽고 떠오른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적습니다. 이때 형식보다 솔직함이 중요합니다. 짧은 문장이어도 괜찮습니다.
연결: 해당 문장이 자신의 삶, 과거의 경험, 다른 책, 혹은 당면한 고민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적어봅니다. 이것이 단순한 독서를 ‘내 삶에 필요한 독서’로 확장시켜 줍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 페이지에 세 줄씩만 기록해도,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자신만의 사유가 담긴 노트 한 권이 생깁니다. 그것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내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자취입니다.
디지털 툴의 활용도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손의 감각’입니다
요즘은 다양한 앱이나 디지털 메모장, 전자책 단말기를 통해 쉽게 하이라이트나 메모를 남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검색이 편리하고, 공간의 제약도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특히 정리된 정보가 많은 분들에겐 훌륭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손으로 직접 쓰는 기록도 함께 병행하실 것을 권합니다.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더 많은 주의력과 정서적 몰입을 요구합니다. 이는 기억의 지속성과 연결됩니다. 손의 감각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글을 쓰며 우리는 문장 속에 자신의 감정을 담고, 느림 속에서 다시 사유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디지털 기록이 ‘빠른 정리’라면, 손글씨 기록은 ‘깊은 정리’라 할 수 있습니다.
기록하는 독서가 삶을 바꾸는 순간들
‘읽는 사람’에서 ‘표현하는 사람’으로 나아가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응답하는 사람이 됩니다. 독서를 통해 쌓인 생각은 기록을 통해 정리되고, 정리된 생각은 언젠가 다시 말이 되고 글이 됩니다. 기록은 ‘나만의 문장’을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실제로 많은 작가, 칼럼니스트, 교육자들이 책을 읽고 기록하는 습관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 체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글을 잘 쓴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남기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서 후 기록을 쌓아가면, 언젠가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현의 형태로 이어지고, 이는 일상에서의 말, 글,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중에 다시 읽는 ‘과거의 나’는 새로운 책이 됩니다
기록된 독서 노트는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책을 다시 펼치기보다는, 그 책을 읽은 후의 ‘내 생각’을 다시 읽는 것이 훨씬 더 진한 여운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책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적어두었던 독서 노트를 다시 읽어보면, 그때의 고민과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다른 문장이 보이고, 같은 문장을 읽더라도 다른 감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책보다 더 진한 시간의 향기를 머금습니다. 결국 기록하는 독서란, 책을 읽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함께 읽는 일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지나가지만, 글로 남기면 돌아옵니다
책을 읽는 순간은 짧지만, 기록은 그 짧은 순간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힘이 있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떠나가는 사유, 사라지는 감정은 결국 또 다른 책 앞에서 반복될 뿐입니다. 그러나 기록을 남기면, 우리는 그 책을 통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삶의 결을 느꼈는지를 분명히 기억하게 됩니다.
독서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책장을 넘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책이 자신의 삶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읽은 책의 한 문장을 쓰는 일, 그것은 작은 시작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만의 사유의 숲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기록은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